'To me, a sculpture is the body, my body is my sculpture'
예년과 달리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이 지나고 따듯한 봄의 소식처럼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Hayward Gallery) 는 루이스 부르주아 (Louis Burgeois, 1911 - 2010) 전시를 하고 있다. 파리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스 부르주아는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녀에게 ‘관계’는 중요한 단어이다. 가족 간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신체와 성적인 모티프 사이의 관계 등 그녀의 작품에서 관계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번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는 바늘과 실, 스티치 기법을 활용해 만든 옷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녀의 마지막 20년 동안의 작업으로, 그녀가 옷이라는 매개체를 모든 단계에서 통합합으로써 표현한 관계의 재해석은 놀랄 만큼 창의적인 조각, 그림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 다시 찢고, 다시 연결하고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조금은 섬뜩한 작품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스쳐봐서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크기의 빨간색, 하얀색 천 조각들이 이곳 저곳에 걸려 있다. 옷가지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는 듯 싶다가도 자세히 보면 옷걸이는 무거운 뼈이며, 걸려있는 곳은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한쪽으로는 부르주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가옥의 모형이 놓여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고, 그 위에서 실을 뽑아내고 있다.
첫번째 전시장의 구석에 있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Untitled> (1996) 는 갈기갈기 찢어진 나무 줄기에 8개의 팔다리가 걸려 있는 작품이다. 나무이 뿌리로 보이는 것을 자세히 들어다보면 인간의 팔이 정말 딱 맞게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이 나무로 변한 것인지 나무가 인간의 몸으로 변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위로 금속나무에 다양한 소재의 팔들이 걸려 있는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늙은 시체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작업을 만들던 당시 작가의 나이 86세를 고려했을 때 아마도 늙어가는 자신을 표현한 걸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나고자 하는 작가의 희망을 보여주는 걸 수도 있다.
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면 앞서 보여준 것과는 조금 다른, 심리적 불안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마주하게 된다. 다양한 천을 끼워 만든 두상들은 이상적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형태를 띠고 있다. 크기도 다양하지만 4개의 얼굴을 이어 붙이기도 하여 그녀의 복잡한 심리적 상태 - 고립, 거부, 욕망 등- 의 역학을 포착하고 있다. 찢어진 천들을 이어 붙이고, 태피스트리를 소재로 사용한 이 작품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무이식에서의 표현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물 모양 패턴의 직물이 얼굴의 정중앙에 놓여 원시적인 충동의 지속적인 존재를 드러낸다.
다음 공간에서 볼 수 있는 <The Good Mother> (2003)는 - 강철 플랫폼에 분홍색 천으로 만들어진 무릎 꿇은 모습의 조각품 - 부드러운 천이 단단한 소재로 변하는 걸 느낄 수 있다. 팔은 없지만, 여성의 모습이다. 그녀의 앞에는 그녀의 가슴과 연결된 다섯 개의 실뭉치가 있다. 다섯 개의 실타래 그녀의 가족을 상징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시간의 실타래와 우리의 관계를 통해 종종 우리의 과거가 다른 방식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이 무릎 꿇은 자세는 이중적인 감정, 복종하는 자세일 뿐 아니라 배려하는 자세로 보인다. 고개가 아래로 향해 있는 것은 소극적인 자세를 나타낸다.
‘When I was growing up, all the women in my house were using needles. I’ve always had a fascination with the needle, the magic power of the needle. The needle is used to repair the damage. It’s a claim to forgiveness. It is never aggressive, it’s not a pin. (내가 자랄 때, 우리 집 여자들은 모두 바늘을 사용했어. 나는 항상 바늘의 마법 같은 힘에 매료되었어. 바늘은 손상을 복구하는데 사용되고, 그건 용서받을 권리야. 그것은 결코 공격적이지 않고, 핀도 아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업이 선정적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작품이 보여주는 모호함에 있다. 인간의 얼굴이지만 그 또한 명확하지 않다. <Rejection>(2001) 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적으로 고통받은 분홍색 두상이다. 많은 천이 사라지고 털실 같은 펠트 소재의 창백함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열된 물건이라기 보다는 낡은 창고에서 볼 수 있는 좀먹은 그런 물건들 같다. 여기서 우리는 루이스가 영원성이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지고 부패하는 피부처럼 힘이 빠지는 인간을 보여준다. 이렇게 바늘과 실이 연결되어 있는 옷가지들이며, 찢어진 천을 다시 연결하면서 만들어낸 여성의 몸을 표현한 조각들은 그녀가 느꼈을 정신적 긴장과 육체적 불안함을 드러낸다. 그녀의 직물 작업은 우리가 모든 것을 깔끔하게 꿰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확장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정서적 수복의 개념을 포함하여 수선의 의미를 다시 상상하도록 한다.
어머니와 거미 그리고 나
전시의 중반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Lady in Waiting> (2003) 을 보자. 나무문과 창문으로 만들어진 폐쇄 공포의 방에는 태피스트리로 만들어진 팔걸이 의자에 강철 다리와 몸을 가진 외로운 거미가 앉아있다. 거미의 입에서 다섯 가닥의 실이 뻗어 나와 창턱 위에 놓인 실패와 연결된다. 이 실들은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며 부르주아 가문의 다섯 구성원 즉, 그녀가 자라던 때 가족과 그녀의 남편인 미술사학자 로버트 골드워터를 암시한다. 가족은 그녀에게 전시장 초입에 있던 Cell VII 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작품에 사용한 옷감들의 경우 그녀의 가족들이 입었던 옷으로, 특히나 어머니의 옷을 많이 사용했다. 그녀가 22살일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불안하고 분노한 딸 주위를 맴돌듯 상징적인 거미가 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거미는 보호와 체계적인 수리의 상징이 된다. 거미는 자기 몸으로 거미둘을 만드는데, 부르주아는 자신의 창조적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보았고, 태피스트리 복원가였던 어머니와도 동일시했다. 부르주아는 그녀의 어머니와 거미를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연관시켰다. 그러나 의자에 힘 없이 앉아있는 거미의 모습은 또한 살지 않는 삶의 상징으로 보일 수있다. 태패스트리 천으로 덮인 의자에서 거미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몸을 숨긴 채 시야가 줄어든 상태에서 기다린다.
갤러리 위층으로 올라가면 전시장 안을 가득 메운 거미와 마주하게 된다. <Spider>(1997)의 거미는 알다시피 부르주아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로, 1990년대와 2000년개에 만들어진 일련의 대규묘 청동 조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구현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거미는 거미줄을 보호하듯이 아래쪽에 있는 강철 그물 모양의 세포 울타리를 걸치고 있다. 태피스트리로 덮인 의자가 울타리의 중아을 차지하고 태피스트리 파편들이 벽에 부착되어 있다. 샬라마르 향수 (부르주아가 가장 좋아하는) 병, 메달, 정지된 시계 등 개인 소지품들은 추억과 잃어버린 시간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거미의 복부 아래에는 천으로 싼 유리알 세 개가 놓여있다. 이 우뚝 솟은 조각은 또한 먹잇감을 가두고 동료를 잡아먹는 포식자로서 거미의 성격을 일깨우는데, 이는 모성애와 성에 대한 부르주아의 보다 복잡하고 양면적인 개념을 암시한다.
‘I came from a family of repairers. The spider is a repairer. If you bash into web of a spider, she doesn’t get mad. She weaves and repairs it. (저는 수리공 가족 출신입니다. 거미는 수리점입니다. 거미줄에 부딪혀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짜로 수리합니다.)’
전시는 부르주아가 죽기 몇 주 전까지 만들었다고 하는 작품들로 마무리 된다. 2000년 부르주아는 1950년대부터 만든 분할된 인물 조각의 수직 형태를 다시 살펴보는 일련의 조각적 작업을 진행했다. 의류, 침대, 린넨, 태피스트리 등 장식물로 만들어진 각각의 조각들은 구성면에서 다양하며, 그것들의 분리된 블록들은 올라갈 수록 크기가 커지거나 감소한다. 부드러운 천과 강철 표면의 뚜렷한 대비는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 기하학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트라우마와 보상, 형상과 추상 등 명백한 대립을 조화시키는 것에 대한 부르주아의 관심을 반영한다. 부르주아에게 형식적 반복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질서감을 재주장하는 역할을 했다. 그녀가 설명하기를 ‘기하학은 일관된 일련의 규칙들은 가지고 있다. 제가 사는 감정세계와는 정반대의 확실성이 있다. (With geometry, you have a consistent set of rules. There is certitude, which is the exact opposite of the emotional world I inhabit)’. 겹겹이 쌓인 패브릭 타워를 구성하는 부드러운 소재는 취약성과 친밀감을 제공함과 동시에 유연성과 적응력, 탄력성을 유지한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그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 데 두려워 하지 않았음은 다양한 크기의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상상하지 어려운 소재들을 이어 붙이고 어려운 개념들과 같이 두어 그녀가 느끼는 경계성 감정들과 생각들은 표현한다. 후기 작품 중 많은 것은 루이스 부르주아이 초기 핵심 관심가들로 되돌아와, 성적 모호성을 탐색하고 심리적, 사회적 관계를 파괴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가 선택한 소재는 촉작적인 취약성 및 친밀감을 불어넣은 부드러운 소재의 천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태피스트리 복원가의 딸로서, 80대의 예술가가 직물로 눈을 돌린 것은 그녀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탐구로 볼 수 있다. 대규모의 설치물을 만들든, 친밀한 크기의 인물상을 만들든, 부르주가는 과거의 경험과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것들이 현재에 계속 남아 있는 방식을 통해 작업했다. 마치 기억의 파편화된 성격을 떠올리듯, 그녀의 직품 피규어는 종종 조각조각 나거나, 팔다리가 빠지거나, 이상한 여분의 부품을 뽐내며 나타난다.
그녀가 지금까지 주목받고 있는 원천은 그녀만의 시선과 해석이 담고 있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의 사상, 생각, 그리고 시선은 시간이 지나도 모든 것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을 루이스 부르주아는 조금 과장이라고 할 만큼 선정적으로 보여준다. 불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그녀의 작업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도, 그 과거 또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데 중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월간미술 (2022. 2)